수필

묵정밭에서

명명가 2013. 9. 25. 23:05

 

    고향 마을의 산자락 옆에 오랜 세월 동안 묵은 묵정밭에는 하얀 망초 꽃이 무리를 지어 피었다. 묵정밭의 망초 꽃은 지난여름을 땡볕에 살을 비비고 버티며 하얗게 피었다. 밭주인이 떠난 후에 밭도 산이 되었다. 떠난 주인이 금방이라도 발자국 소리를 내며 돌아올 것 같다. 호미와 삽을 들고 올 것 같아 무심한 산새가 숨어들고 있다. 묵정밭에는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도 갈아엎을 주인을 기다린다. 풀냄새를 좋아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하는 사람이면 족하다.

 

그 옛날 어머니는 긴긴 뙤약볕에 이 묵정밭을 매시랴 떨어지는 땀을 씻고, 무딘 호미 한 자루 들고 계셨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지개 끝이 넘을까말까 하게 쇠꼴을 한 짐 지시고 돌아오셨다. 그 풀을 소에게 먹이로도 주고, 모깃불을 피우기도 하고, 찬물 한 바가지로 몸을 적시고, 밀집방석을 편 다음 식구들이 빙 둘러 앉았다. 모깃불의 연기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도 별다른 동요 없이 저녁상 앞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밥그릇에 열무김치를 올려 아작아작 잘도 먹었다.

묵정밭이 그리운 것은 뒷산 뻐꾸기 우는 고향 하늘이 좋고, 어린 날 머릿속에 남은 그리움이 좋고, 흙에서 태어나 흙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신 우리 선조들의 옛이야기가 좋고, 아득히 내려오는 슬픈 인연이 소리 없이 부르는 것이 좋다. 그래서 이곳에 욕심껏 온갖 채소를 풀어놓고 싶다.

묵정밭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은 손이 닿지 않아 못 긁은 등처럼 어린 시절이 가렵다. 묵정밭 앞에 서면 신중년(新中年)의 만추가경(晩秋佳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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