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무지했던 믿음생활

명명가 2013. 9. 30. 09:36

무지했던 믿음생활

 

그 때는 그리움도 없었다.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었다.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던 1980년대는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덤비듯 살았다. 이 농촌 마을의 살림살이는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였다. 마을 뒤 언덕 가장 높은 자리에는 큰 교회가 있었고 주일날이 되면 교회 종소리가 멀리 있는 다른 마을까지 들렸고, 근처 사람들 중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은 성경책을 옆에 끼고 하나 둘씩 모여 예배를 드렸다.

나도 함께 근무하는 음악 선생님과 함께 자주 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에 나가면 시골생활의 한적함을 달랠 수 있었다. 나란히 앉아 찬송가를 부르노라면 옆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가 마치 내가 부르는 것처럼 은은하게 위안을 주었다. 그 선생님의 찬송가 소리는 어찌나 감미로운지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왔으며 텅 빈 교회당에 나가 기도하자고 권유할 때도 있었다. 왜냐고 물으면 마음의 짐을 놓고 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교회 행사의 하나로 찬송가 경연대회가 있었다.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심사를 보라고 하였다. 사양해도 막무가내였다. 분위기에 휩싸여 떠밀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을 심사하는 것처럼 교인들의 찬송가 경연대회에 참여하였다. 찬송가 경연대회 중간에 우리 부부에게 함께 찬송가를 부르라는 권유가 있었다. 마지못해 우리는 앞에 나가 455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찬송하였다. 부를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인들의 반응은 대단하였다. 믿음도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환대해주니 너무 감사했다. 주님의 행복을 모르고 지나갔다. 목사님은 우리를 무척이나 이해하여주셨다. 심방은 혼자 오셨다. 그때 나는 가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울 때였다. 담배를 피워 방안이 자욱할 때 내 방을 찾은 적도 있었다. 쑥스러운 것도 몰랐다. 담배를 왜 피우는지 모르고 그냥 습관대로 피웠다. 후에 목이 안 좋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목사님의 아들이 2명 있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모래를 가득 묻힌 발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우리 아들이 못 올라오게 하고 먼지와 흙을 다 털어낸 후에 들여보낸 적도 있었다. 한번은 목사님이 봉고차를 이용하여 딸기밭에 간다고 집사님들을 모두 모시고 가는데 나도 초대해 주셨다. 낯선 시골에 살아도 외로울 틈이 없었다. 전체 교인들이 모여 체육대회도 하였다. 내가 근무하는 중학교 운동장을 빌려 행사를 하였다. 그 때 자기 자식들을 업고 달리는 경주가 있었다. 교인들이 모두 자기 자식들을 업고 달렸다. 그 중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업고 있는 힘을 다해 달리던 모습은 오래 기억되었다. 여신도 달리기도 있었는데 아내도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어릴 적 운동회 때 달리던 실력이 안 나온다고 불만이었다. 나는 심판도 보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장 선생님이며 하숙하며 본가에 가지 않은 선생님들도 모두 모시고 예배도 드리고 음식도 나누어 먹었다. 교인들의 체육대회가 지역 사회인들과 한데 어울리는 행사가 되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나 안 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주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영어로 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친 적도 있었다. 번역해 놓은 자료가 많아 어려움은 없었다. 이런 어설픈 생활이 작은 믿음이었다. 그 때는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었다. 순간순간마다 은혜에 감사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일들이 생겼다. 기도가 따로 없어도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어디서 누구와 기도했는가가 더 중요했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더라도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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