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 길을 찾아서

명명가 2014. 9. 3. 10:10

새 길을 찾아서

 

산길을 오르고, 철길 따라 걷고, 기차 터널 속을 걸으며

빛을 찾아 새 길을 찾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우리 집은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아버지께서 1년 쉬었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체념하고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내 사정은 뒤로 하고 가정형편이 앞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가 놀러 왔다. 자기는 인근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등록금이 쌀 여섯 말 값이고 정원 미달이라 선착순으로 추가 모집하니 함께 가자고 하였다. 아버지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입학금을 어렵게 마련하여 등록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농사꾼으로 살고 싶지도 않았고, 농업고등학교에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첫발을 그렇게 들여놓았다. 등하교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도보로 8km 정도 걸어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기차를 이용하여 통학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기차 시간은 잘 맞지 않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입학식 날, 다른 학생들을 따라 걸어서 등교했다. 고등학교 병설인 학교였다. 같이 통학할 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여 20여명 정도가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부터 중학교 1학년 학생까지 줄을 지어 걸었다. 산길 들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하니 각양각색의 사연을 안고 들어선 친구들을 만났다. 아무 생각도 없는 친구,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친구, 군인이 되고 싶은 친구, 면서기(공무원), 농협 직원, 농촌지도소 직원 등 희망도 여러 가지이다.

등교하는 길은 참 멀었다. 이 길은 내 젊음의 한 자락이고 꿈의 시작점이었다. 겨울철이 되어 겨울바람과 눈에 덮인 길을 가노라면 발이 꽁꽁 얼어붙곤 했다. 뒷산을 넘고 철길을 따라 가면 높은 산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를 넘어야 학교로 갈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눈 쌓인 산길 바로 아래는 철길이 이어져 있었고, 밤새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들이 가지를 부러뜨린 채 기울어져 있었다. ‘우두둑하고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다. 그 고개를 겨우 넘고 나면 철길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 산길은 무서웠다. 그래서 늦도록 기다렸다가 막차를 타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산 밑으로 기차 터널이 뚫려 있었다. 그 기차 터널의 길이는 1km가 더 되었다. 기차 터널 입구에 서서 굴속을 보면 저 멀리 구멍만 보이고 깜깜하였다. 산 고개를 넘어가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기차 터널을 통과하면 빨리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기차 터널을 지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시절에는 기차 속도가 느렸다. 멀리서 기차가 오는 불빛이 비치고, 기적이 울리면 굴속 옆에 있는 대피소로 대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무서웠다. 친구들은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을 다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냥 따라 다녔다. 여러 번 따라 다니다 보니 익숙해졌고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오히려 그 터널이 더 편했다. 갑자기 기차가 저 멀리서 기적을 울리고 들어오면 우리는 미리 가지고 간 긴 막대기를 벽에 대고 달리다 움푹 들어간 대피소를 찾아 들어갔다. 대피소는 자주 있었다. 어느 날은 한 대피소에 여러 명이 들어가 하복에 검정 때가 묻은 학생도 있었다. 그런 행동을 자주 하니까 기차 기관사가 차를 세우고 학생 두 명을 기차 기관실에 태우고 갔다. 학교로 연락하여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산길 따라 산을 넘고 철길 따라 들판을 지나고 기차 터널 속에서 빛을 찾아 앞날을 다지며 희망을 노래했다. 그 때는 등하교하는 어려움이 내 앞날의 삶을 미리 연습하는 것임을 몰랐다. 고개를 만나고 그 고개를 다 넘으면 새로운 산길이 이어지는 끝없는 일들이 이어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어렵고 부족하던 그 시절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도 몰랐다. 오소야천, 고다능비사(五少也賤, 故多能鄙事) 나는 젊어서 미천하였기에 보잘 것 없는 일에 다 능하다.’ 라는 뜻도 그때는 몰랐다. 이 모든 일들이 환골탈태하고 인생을 다림질하는 과정이었다.

삶의 변화는 마음속에서 시작되었다. 1학년 때는 무조건 학교 공부에 충실하면 무엇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른 학교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차이가 너무 많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더니 수학 선생님과 물리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칭찬해주시고 믿어 주셔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1학년 과정을 충실히 마치고 2학년이 될 무렵, 나는 학교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인문과목 국어, 영어, 수학, 물리(화학) 역사교과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문과목의 수업시간 수가 다른 인문계고등학교의 절반도 안 되었고, 교과서 자체가 달랐다. 교과 진도는 절반만 나가고 그냥 지나갔다. 어떻게 다른 인문계고등학교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나는 1학년 동안 지각이나 결석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농업 과목은 보기가 싫었다. 면서기(공무원)나 농촌지도소 직원이 될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부터 학교생활을 소홀히 하였다. 고교 2학년부터 3학년까지 여름방학이 되면 대도시에 있는 학원에 갔다. 그리고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이 어떤 참고서로 공부하는지 알아보기도 하고 실력향상에 전력을 다했다. 그들이 많이 보는 참고서를 준비하여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웠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결석을 많이 하였다. 시간표에 인문과목이 없다든지 학교행사를 한다든지 하면 여지없이 결석하고 혼자서 구석진 방에 앉아 책과 씨름하였다. 결석을 자주해도 담임선생님은 별 말씀이 없으셨다. 손에 단어장을 들고 산과 들을 다니며 내일을 기약했다. 아니 희망을 손에 들고 다니며 내일을 그렸다. 그 모습을 뒷동네로 시집간 집안 누나가 매형과 논밭에서 일하시다가 보시고는 만날 때마다 그 모습이 너무 듬직하다고 칭찬해주셨다. 1, 2학년 담임은 농업과목 선생님이셨고, 3학년 담임은 영어선생님이셨다. 영어선생님의 교수방법은 영어사전을 옆에 놓고 단어를 찾아가면서 시간되는 대로 독해나 해주시면 그만이었다. 학생들에게 별 다른 기대를 하시지 않았다. 학생들이 사고를 많이 치고 결석도 잘 하는 문제가 많은 제자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도 참석하지 않고 좁은 방에서 입시에 전념했다. 그렇게 고교시절을 마치고 대학 시험을 보기 위해 원서를 쓰려고 담임선생님 댁으로 친구와 담배 한 보루씩 사가지고 같이 갔다. 내가 진학하려는 대학이 수업료가 무료이고 직장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았다. 담임선생님은 합격할지 의심스러운 눈치였다.

대학입시가 있는 날 교직에 몸담고 있는 외사촌 형님이 동행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형님의 갑작스런 사정으로 우리끼리만 갔다. 외사촌 형의 사촌 처남이자 같은 반 급우인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서 잠을 잔 후, 같은 버스를 타고 함께 시험 장소로 향했다. 예비소집 장소에 가보니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몇 년씩 재수한 선배부터 지방의 이름난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거 지원했고, 안면이 많은 선배들과 친구들이 많이 보였다. 그야말로 출신학교로 치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학교 선배들이 해마다 입학했다는 것과 그 선배들이 많은 편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험표를 받고 시험장소를 확인한 후 선배들이 안내해주는 민박집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 시간을 기다렸다. 시험을 보는 날은 마음이 가벼웠다. 수학과 물리 역사 과목을 잘 치렀다. 비교적 쉽게 문제를 풀었다. 시험을 치룬 후의 기분은 정말 좋았다. 같은 수험생들과 집으로 오는 길이 남몰래 기뻤다.

조마조마하던 시간은 흘러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합격 여부를 알아보는 방법은 직접 가서 보는 방법과 전화로 확인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우리 동네에 전화가 한 집도 없었다. 그래서 우체국으로 가서 시외 전화를 신청하고 합격 여부를 확인하였다.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여자 동기 동창이 우체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 확인해주고 축하해 주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생한 보람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 다음날 모교를 찾았다, 교무실에 들어서니 선생님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의 경사라면서 축하해주셨다. 담임 선생님은 졸업장, 기념품 등을 주셨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른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을 만나 학교게시판이 있는 곳을 지나가는데 게시판에 예쁜 글씨로 몇 명뿐인 대입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상록수가 길게 늘어선 후문 쪽으로 나올 즈음, 후배들이 몰려와 인사하면서 축하와 공부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며 야단법석이었다. 며칠 사이에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 때는 세상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우리 집은 가정형편이 더 악화되어 또 논 2마지기를 팔아 대학생활비와 하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오가던 산길에 나무만 울창하고, 기차 터널 입구는 막아버렸고 기찻길은 흔적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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