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노년의 삶

명명가 2017. 3. 16. 09:28

어르신이 귀가 어두운 것은 좋은 소리만 들으라는 뜻이다.


가끔 지인들이 나에게 말한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
“그냥 그렇게 지내지요.”
대답이 궁색하다. 노년을 사는 남자로서, 할아버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집안의 어른으로서 할 말은 많다. 그런데 무엇을 하고 지내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변변치 않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 능력을 모르고 자랐고, 부모님의 농촌 생활만 보고 자랐다. 내가 성인이 되어 자식들에게 그리 자상한 아빠는 아니었다. 어찌어찌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가 되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의 가치관도 서서히 변했다. 나는 인생에서 극적인 변화나 새로운 존재 방식을 적극적으로 찾기보다는 일을 조금씩 덜어내는 빼기의 철학을 추구하였다. 삶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욕망과 미움에서 자유로워져야 했다. 감정과 사고에 얽매어 나의 존재 자체와 혼동하며 살기도 했다. 내가 저지른 숱한 시행착오가 이득이 되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

여기에 늙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다. 앞이마가 벗겨진 둥그스름한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아래로 처진 눈썹, 구부러지고 선한 눈매, 아담한 코, 말을 아끼려는 입, 빈약한 어깨, 작고 아담한 체격, 충청도 사투리가 섞여 나오는 말 투, 평범한 외모를 가진 할아버지가 있다. 그의 얼굴에 세월은 가고 추억만 남았다. 그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날에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그리움을 말한다. 그는 10년만 뒤로 돌아가 느린 시간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지난 시간을 아쉬워한다. 사람이 나이 들어 귀가 어두운 것은 좋은 소리만 골라 들으라는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한다. 나이를 더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손에 쥐려고 하는 것이 적어지고 어울려 ‘나 여기 있음’을 확인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왜 그는 정겨운 소리만 찾고 있을까?

또 한 해를 보내는 성탄절이다. 종지기를 하셨던 분이 옛날의 교회 종소리가 그립다고 말한다. 흰 눈이 쌓인 마을에 교회당이 있고 종탑이 우뚝 솟아 있어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종소리가 울려 퍼져 고요한 마을에 은은하게 퍼져 올 때에 마음이 온화하여졌던 어린 시절이 생생하다. 어린 시절에는 시계가 귀하였다. 이 시절에 시각을 알리는 교회당의 새벽 종소리가 있었다. 집집마다 이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 일과의 시작과 끝나는 시각을 가늠하였다. 근대화가 되면서 한 마을에도 여기저기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고 실제 종소리와 녹음된 종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불신자들에게는 짜증나는 소음공해였다. 1990년 ‘소음진동규제법’이 제정되어 교회의 종소리가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저 멀리서 들려오던 은은한 종소리가 다시 듣고 싶다.

교회의 종소리가 왜 듣고 싶을까?
젊음을 잃은 허전함 때문일까?

오늘은 그 시절의 종소리를 듣고 싶다.
여기 귀가 밝은 노인이 살고 있다. 창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 비바람 소리, 안내 방송, 택배 아저씨 소리, 위층에서 들리는 쿵쿵 거리는 소리를 잘 듣는다. 밤이 깊으면 쉬지 않고 돌아가는 냉장고 소리, 밤을 잊은 젊은이들의 술주정 소리, 새벽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잘 듣는다. 그의 젊은 세월은 마구 흘러갔다.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사람들과 맺은 인연이 그 인생이었다. 그의 촛불이 이제는 3분의 1도 안 남았다. 발코니에 놓인 그의 화분이 이제 꽃만 무성하다. 그는 이 꽃이 가장 화려한 때라며 안주하는 삶을 추구한다.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이 해산되었다.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이 하나 둘씩 늘면서 불길한 징조라며 해산했다. 반면에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대학교 동창들의 모임은 더 활성화되어 매주 1회씩 등산을 한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현관에서 신문을 주워오고 거실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보고 ‘야! 날씨 좋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루의 신비감에 젖는다. 젊었을 때 아침마다 출근하기 바빠 느껴보지 못한 신비감을 이제야 느낀다. 오늘의 이 아침에 보이는 것마다 보이지 않는 행복을 잡고 서 있다. 노년을 사는 그만이 알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인생의 시간이 줄어든다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더 소중하다.

그의 시대는 변했다. 예전에는 부모세대가 자식 세대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즈음은 거꾸로 자식세대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부모 세대가 경험한 일보다 자식세대가 경험한 일이 생활에 더 유용하다.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젊은이들이 더 자유롭게 이용한다. 어르신들의 머릿속에 있던 삶의 노하우, 생활 방식, 온갖 생활의 지혜가 이 컴퓨터나 스마트 폰에 다 저장되어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젊은이들의 특성이 더해지면 의사소통이 잘 안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르신 세대는 굶주림을 극복하고 잘 살아보자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그들끼리 모여 그들만의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들만의 즐거움이다. 그들은 나이가 들수록 젊은 날에 부러워했던 일들이 이제는 큰 의미가 없어졌고 오늘에 만족하는 사소한 일상이 행복이다.

아내가 나에게 말한다.
“여보, 이제 당신도 홀로서기를 해봐요.”
“웬 홀로서기”
“만약 내가 먼저 죽으면 스스로 모든 일을 해야지요.”
“쓸데없는 소리를 다하네.”
돌아서서 혼자 생각한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같은 날에 죽을 수는 없다. 누가 먼저 죽든지 한 사람은 남는다. 그 확률은 50%이다. 누가 먼저 떠나든지 남는 자는 그 후의 삶에 대비하는 것이 충격을 완화하는 일이다. 자녀들 앞에서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해도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아내와 사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할 가능성이 높고 여성은 무기력해진다고 한다. 행복한 노후의 조건으로 배우자의 있고 없음이라고 한다.

2004. 9. 10. (117-1759)

노년에는 가족을 너무 의지하지 말아야 하고, 행복한 시간을 가지고 싶으면 취미 생활을 해야 한다. 산이 좋으면 산에 가고, 낚시가 좋으면 낚시하러 가고, 책이 좋으면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으면 열심히 쓰면 된다. 그 길이 쓸쓸한 노년을 의미 있는 삶으로 바꾸는 비결이다. 자식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따로 있음을 인정하고 적당한 관심과 기대가 노년을 평안하게 사는 길이다. 나이 들수록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친구가 보낸 카카오톡에 현대인의 5복을 읽는다. 건강, 아내, 일, 재물, 친구가 5복이다. 참으로 쉬운 것 같지만 나이 들면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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