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명명가 2012. 9. 3. 00:11

나는 총각 때에 영화 감상이 취미였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시간을 살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감상했다. 두 영화는 모두 남자들의 세계를 주요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실미도'에서‘시대착오'라는 저승사자를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들은 이제 쓸모 없는 인간이다. 왜냐하면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684부대는 이제 무장공비야.’영화를 감상하고 나오는 나에게 주는 여운은 억울함과 압박감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신구 양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이다. 이진태는 진석(동생)을 몹시 사랑한다. 문제는 그 사랑의 방식을 진석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진석이 볼 때 형 진태의 사랑은 자기만족과 기만에 불과하다. 구두닦이이던 진태는 전쟁을 통해 인정도 받고 태극무공훈장도 타내며 신나게 싸운다. 그러면서도 자꾸 그것은 동생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형은 윤리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악행이란 악행은 다 저지른다. 동생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다 동생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동생은 형의 부도덕이 싫다. 또한 그걸 동생을 위하여 한다는 것이 더 싫다. 반면 형은, 자기 덕분에 깨끗할 수 있었던 동생이 자신의 은공을 몰라주는 게 못내 서운하다.
  신문지상이나 TV에서는 흥행에 성공했느니 관객 천 만 명을 돌발했다느니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두 영화가 모두 용공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두 영화를 모두 본 나는 이와 같은 논란이 이들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대리만족의 맥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미도'는 또 최소 20개 스크린 개봉조건으로 독일 EMS사에 팔렸으며, 스칸디나비아의 노벨&파트너엔터테인먼트는 아시아 영화중 최고수준의 구매계약을 했다고 한다. 이밖에 미국을 비롯한 호주, 프랑스, 홍콩, 그리스, 이스라엘, 태국, 싱가포르 등 각국의 바이어들이 '실미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어 한국 영화 역대 최고조건 수출이 줄지을 전망이다.
  2004년 2월 27일(한국시간) 미국 LA에서 열린 아메리칸 필름 마켓의 '태극기 휘날리며' 공식 시사회 자리는 많은 나라에서 몰려든 영화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세계적 필름 마켓에서 아시아 영화가 만석을 이루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태극기 휘날리며'에 쏠린 세계의 시선을 실감케 했다고 한다.
  시사회가 끝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영화에 감명 받은 여러 나라의 바이어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책을 협의하는 등 찬사 속에 계약 성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과 영화에서 열연한 장동건, 원빈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비슷한 시기에 관객 동원 천 만 명이라는 기록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15세 이상의 인구 가운데 극장에 갈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의 약 절반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의미가 된다.
  인구의 절반이 두 영화를 모두 관람했다는 말은 남녀노소, 직업, 계층, 지역, 이념 등과 같은 사회적 배경과 관계없이 문화적 수용성을 즐길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 거의 모두가 이 두 영화를 즐겼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실미도'에서 북한기를 찬양하는 듯한 장면과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두 주인공이 강제 징집되는 장면이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점들이 지금까지 우리들의 사상에 좀 색다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관객들이 더 많이 찾는 가 싶다.
  두 영화 모두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 즉 분단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실미도'가 남북 분단으로 인한 냉전상태에서 오는 개인이 겪는 집단적 좌절을 표현하고 있다면,‘태극기 휘날리며'는 6.25 전쟁이라는 잔혹한 현실에서 형제가 겪는 갈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남북분단이라는 틀에서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식상에서 오는 좌절감을 해소하고자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시대의 좌절감을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흥행의 조건이 되고 있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대리만족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관객에게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실미도'를 감상하고 나오는 어떤 사람들은 '김일성의 목 따는 일'이 성사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미련을 말하기도 하였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형이 가족주의에 맹목적으로 함몰되어 자기를 파괴하는 동안 동생은 끊임없이 동료에 대한 배려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 같은 근대적 윤리를 환기시킨다. 전쟁터와 같은 절박한 현실에서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해대고 있는 동생에게 형은 분노를 느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2004년 봄에 호기심으로 감상하는 천 만 관객 속에 나도 한 좌석을 차지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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