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파트의 시선이 부담스럽습니다.
낙엽이 지는 날의 오후입니다. 저토록 말끔한 얼굴을 하고서 건너다보는 건물들의 시선 앞에서는 늘 부끄럽습니다.
인간의 눈길이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무엇이 느껴져 더욱 부끄럽습니다.
공원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는 저 운동복 차림의 보행자를 보면 좀더 알기 쉽고 좀더 단순하게 이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아내는 슈퍼에 갔고 딸아이는 멀리 영국에 어학 연수로 제 방을 비운지 네 달째가 되고 있습니다.
아들은 서울의 어떤 거리를 헤매고 있나 봅니다. 나름대로 무엇을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에겐 이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이 시간에 잔잔한 가요를 틀어놓고 먹다 버려진 누룽지를 조금씩 입으로 음미해보면 거대한 강줄기에 다다른 듯한 설렘이 있습니다.
혼자만의 자유를 포근하게 느끼는 기분이랄까?
무슨 노래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멜로디만으로도 그 곡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나는 좋아합니다.
노래는 잘 부르지 못할지언정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행가요도 즐겨 들을 때가 많습니다.
굵은 저음으로 가슴 밑바닥을 출렁이다가 강한 박자로 북을 치듯 가슴을 흔드는 손길로 몸을 취하게 하는 그런 리듬이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도 행복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어둠이 내리면 '이제는 가을입니다.'하듯 귀뚜라미가 소리 높여 울 것입니다.
낮과 밤이 서로 계절을 달리하지만 여름은 한 뼘씩 물러가고 가을은 어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강가에서 별을 보며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고 오직 자연의 소리만 들려오는 깊은 숲 속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며칠을 지내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는데 여름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습니다.
불안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증거라고 합니다.
또 미래를 두려한다면 그는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시간을 만들어보겠습니다.
( 1997년 10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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